사이토 유나는 시유되지 않은 도자기와 액체 염료를 사용해 흙-물의 이동 과정을 기록한다. 도자기에 액체로 된 염화코발트 또는 섬유염료를 가득 담으면, 안료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밖으로 서서히 스며나온다. 흙의 기공을 투과한 액체는 지나간 자리마다 기면 안팎을 물들이며 다양한 흔적을 남긴다. 비정형적인 패턴이 자연스럽게 도자기나 캔버스 위에 드러날 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사이토 유나의 작업에서 중심에 놓여있는 것은 재료 그 자체이다. 흙과 물의 특성을 수차례 실험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이 그에게는 작업의 원동력이 된다. 실패한 줄 알았던 작품이 살아있었다는 걸 알게된 순간, 시간을 거쳐 완성된 형태를 탐색하는 과정은 곧 작품의 철학이자 주제이다. 완성된 도자기에는 그 과정이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과정이 있기에 도자기는 단순한 ‘무생물'이 아닌 손으로 빚어낸 ‘자연으로부터 온 인공물'이 된다.
흙에서 흙으로, 물의 여정
일본 아이치현립대학교에서 도자를 전공한 작가는 물레에 기반한 전통 도자 과정이 아닌, 캐스팅을 바탕으로 한 양산 도자 과정을 선택했다. 캐스팅 기법을 배우며 그는 일정한 형태로 뽑아낸 기물이 여러 원인에 의해 ‘실패’하는 것을 경험했지만, 오히려 실패작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작가의 초기 작업은 캐스팅 작업에서 흡수성에 따라 나타나는 여러 가지 차이를 실험하고 그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석고틀에 흙물을 넣으면 틀이 물을 흡수하면서 기물의 모양이 잡히는데, 흙물 안에서 틀 안으로 수분이 이동하는 현상 자체에 관심이 갔어요. 실패한 작업에는 오히려 수분이 이동한 흔적이 잘 남아있었죠. 제 작업에서 정말 아름다운 부분은 틀이 물을 흡수해서 나타난 기물의 ‘안쪽'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학부 졸업 후 작가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종의 도자 ‘염색’ 기법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석사 진학을 결정한 뒤 코로나로 인해 반 년간 집에 머물렀던 시기. 가마 없이도 할 수 있는 작업에 대해 고민하다, 이전에 시유가 잘못되어 기면에 스며드는 바람에 ‘실패’한 경험에서 착안했다. 초기에는 식용 안료를 도자기에 흡수시켜보는 등 기물에 색을 입히고자 다양하게 시도했다. 현재 도자기에는 염화코발트, 캔버스에는 섬유염료를 사용해 작업하고 있다.
흙과 물의 하모니, 색의 여정
사이토 유나는 안료가 섞인 액체를 기물에 붓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스며나오는 현상을 이용해 작업한다. 드러난 태토를 손으로 만져보면 시유되지 않은 도자기 특유의 거칠한 흙의 느낌이 그대로 전달된다. 보이지 않는 촘촘한 기공으로 여전히 ‘물'이 드나들 틈이 있다는 것을 손 끝으로 알 수 있다. “도자기가 염료를 흡수하고 배출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무생물인 도자기가 호흡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캐스팅 작업으로 만들어진 도자기는 동일한 형태를 띄고 있지만, 표면의 문양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다. 석고 틀에 흙물을 붓고 물이 흡수되는 과정을 통해 기물은 최초로 일정한 ‘형태'를 갖춘다. 작업 방식의 하나로 도자기를 석고 틀에 넣은 채로 염료를 부어서 작업하면, 염료가 흘러내린 자국과 서서히 흡수되는 과정이 모두 그대로 도자기의 표면에 기록된다. 짙은 푸른빛의 염료가 그려낸 한 폭의 산수화인 셈이다.
작가는 때때로 발수제 등을 사용해 의도한 패턴을 그려냄으로써 심미적 아름다움을 더한다. 액체의 흡수를 방해하는 발수제를 활용하면 도자기의 문양은 규칙과 비규칙이 혼재하게 된다. 액체는 여전히 자연의 법칙에 따라 서서히 흡수되며 자연스러운 패턴을 그리지만, 발수제가 지나간 자리는 선 또는 면으로 ‘부자연스러운'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발수제를 통해 작가는 ‘격자무늬'와 같은 인공물 안의 자연성, ‘호수에 비치는 달'과 같은 자연의 면면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흙-물이라는 재료의 성질 자체를 끈질기게 탐구해온 사이토 유나는, 앞으로 도자기 안에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치景致’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예정이다. 도자기는 손으로 빚어지지만 그 마지막 완성 단계에는 결국 불에 의한 우연이 개입하게 된다. 오래 전부터 일본의 풍류인은 가마의 소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연적인 질감이나 색깔을 ‘경치'에 빗대어 표현했다. “감사하게도 제 작품을 보고 힐링이 된다는 분들이나, 제 작품을 두고 폭포 같다거나 돌 같다는 표현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이 분들을 통해 저도 제 작품 안의 자연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의 마음이 가는 곳, 작가가 그려낼 정경이 기대된다.
김기혜 독립큐레이터
월간도예 Monthly Ceramic Art 2024.02 Vol.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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