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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류호식, 안온하고 평안한 집 (Aug 2024)

류호식은 페이퍼클레이를 사용해 안온하고 평안한 공간[Querencia]을 만든다. 그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아름다운 순간에서 주제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문득 마주치는 순간의 풍경을 사진 또는 스케치로 기록하고, 이를 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떠올려보며 다시 그린다. 삶에 위안이 되었던 순간을 상상으로 되짚어 가는 길. 그에게 작업 과정은 매 순간 눈으로, 마음으로, 손으로 이상향을 덧그리는 일이다. 여러 번 덧칠된 이미지는 당시의 감흥이나 정서만을 남긴 채 추상적이고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흙을 만지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 수 있으면 행복할 거라는 마음가짐으로, 그는 경일대학교에서 도자를 전공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도예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일찍부터 흙으로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어린이였던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진로를 고민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서야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진로를 ‘도예가’로 정했다. “우연히 만화 기획자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만화를 만들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하는 거에요. 그 말이 저에게 영감이 됐어요.” 학교에서 그는 흙을 만지면서 자신을 탐구하고 작업이 삶이 되는 과정을 배웠다.

 


류호식에게 흙은 행위 자체에서 위안을 주는 치유의 매개체이다. 동시에 흙은 삶에서 마주하는 고통의 기억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매체이자, 따뜻하고 안전한 피난처인 상상 속의 공간-집으로 초대하는 재료가 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연을 통해 그는 어린 시절 크게 아팠던 경험, 쉽게 잠 못 들던 날들의 기억, 죽음에 대한 공포와 우울감을 위로받았다. 푸르고 맑은 하늘, 녹음으로 가득한 산은 페이퍼클레이를 통해 밝은 색채와 동화적인 이미지로 화폭 위에 묘사됐다.

“스스로를 치유하고 기쁨을 찾는 경험을 자연에서 많이 얻었던 것 같아요.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자연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에 나 자신을 좀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었어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자각하면서 지금의 행복, 현재를 소중히 생각하며 살자는 마음이 들었고요. 작가로서 머리 속에 있는 이미지를 현실로 ‘번역’하는 일을 손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제 머리 속의 이상적인 풍경과 감정을 흙 작업을 통해 시각적인 결과물로 만들어내고 있는 거죠.” 

페이퍼클레이라는 재료는 물성의 변화를 통해 좀더 새로운 작업을 만들고자 하는 고민에서 탄생했다. 페이퍼클레이를 만들기 위해 그는 시편을 백번 넘게 제작하면서 광택이나 처짐 정도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페이퍼클레이는 직접 만드는데 보통 하루가 꼬박 소요된다. 여러 광물을 넣어서 재료를 혼합해 흙을 만들어 쓰면서 파손률을 낮출 수 있었고, 작품 특유의 독특한 질감을 구현할 수 있게 됐다. 또한 흙 융점 자체를 낮춤으로써 무유 작업임에도 표면 광택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장점이다. 

류호식은 작업을 크게 도자회화[painting], 오브제[object], 기器작업[functional]으로 분류한다. 가장 중점을 두고 작업하고 있는 도자회화[painting]에서는 ‘집’이 곧 주제이자 중심 소재가 된다. 이상에 가까운 집의 모습은 상황, 생각, 감정, 정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석사 시절 작업한 <If I was a god>은 자신이 신이라고 상상했을 때 가장 이상적인 공간에 가까운 ‘무릉도원’의 모습을 현대판 몽유도원도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졸업 후 국내외로 여러 레지던시를 거치며 그는 자신이 경험한 김해, 고흥, 핀란드, 대만 등에서 만난 이상적인 풍경을 자신의 눈으로 재구성한 작품을 선보여왔다.

 


어떤 풍경은 양감을 갖춘 오브제[object]로, 기器작업[functional]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때가 있다. <Concrete utopia>는 데이지 꽃과 같은 자연에 둘러싸인 인물상 연작이다. 바탕이 되는 인물의 형태는 자신의 신체를 3D 스캔해서 출력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나오는 희망의 상징인 민들레처럼, 데이지는 그의 작품에서 희망의 매개체가 된다. 기器는 주제와 키워드를 일상적인 사물에 녹이고,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방면으로 구현하기 위해 고민한다. 핀란드의 자연을 소재로 한 <Posio natural> 연작은 흙으로 빚은 항아리와 자연에서 가져온 나무, 돌 등을 병렬적으로 배치한 작품이다. 

 

작년까지 그는 대만을 비롯해 국내외의 레지던시를 거쳤으며, 2023년 고흥분청사기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평면과 입체, 설치를 넘나들며 테이블웨어부터 2m 이상의 조형 작품까지 만들어본 경험은 작업의 방향성을 정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올해 그는 집이라는 건축물과 자연을 오버랩하는 과정, 이상과 현실이 만나는 지점을 평면 위에 다양하게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앞으로도 여러 레지던시를 경험해보고 더 많은 풍경을 만나고 싶다는 그는 이천 AK세라믹센터에서 작업에 매진 중이다. 향후 류호식이 만들어갈 이상적인 풍경, 행복을 나누는 장소로서의 ‘확장된 집’을 기대해본다.

 


김기혜 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