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기는 물질의 스펙트럼을 끈기있게 파고들어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작가이다. ‘Unveiled series’는 망간이라는 재료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됐다. 검은 색 유약의 원료 중 하나인 망간은 과포화되면 주름이 지거나 러스터와 같이 금속의 물성이 강조되는 성질이 있다. 작가는 망간을 사용해 표면이 매끈하게 마감된 브러시드 메탈(brushed metal)의 질감 또는 무쇠 주물처럼 보이는 러프한 질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명료하게 보이는 재료의 특성, 그리고 그 너머의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을 추적하는 일련의 실험을 통해 하나의 물질은 비로소 새로운 이면을 드러낸다.
망간을 과포화시킨 유약은 고온에서 망간 결정이 석출된다. 결정은 일반적으로 유약의 용융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데, 작품에 적용된 유약은 용융도가 낮다. 이런 환경에서 고르게 퍼지지 못한 결정의 밀도 차에 의해 표면에 무질서한 요철이 발생한다. 이 요철은 소성 직후 매트한 금속 피막에 가려져 있고, 이를 곱게 연마하여 제거하면 목탄과 같은 무늬가 드러난다. 결정이 응집하여 상대적으로 돌출된 부분은 검은색으로, 그렇지 않은 부분은 적동색의 메탈릭한 질감으로 연마되는 것이다.
‘Unveiled series’는 백자토로 물레를 차서 기본적인 기器의 형태를 만들고 유약을 시유한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망간 과포화 유약의 색과 질감을 드러내기에 최적화된 바탕인 셈이다. 기의 형태를 두고 그는 ‘역사에서 맥락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진 수많은 사발의 형태처럼 그는 물레를 차서 그릇을 하나씩 빚어낸다. 망간 유약을 시유한 그릇 하나 하나는 ‘기물 시편’으로 정교하게 가마에서 구워진다. 태토는 백자지만 바닥면까지 이장을 분사해 검게 칠하는 등, 기물 전체가 금속적으로 보이도록 섬세하고 노동집약적인 마감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도예를 전공한 박래기는 학부시절 백자를 중심으로 흙을 다루는 법을 배우며, 졸업 후 보다 다양한 물질을 다뤄보고자 했다. 동 대학 석사과정에 진학한 뒤, 그는 마침 뿌리와 줄기가 한 몸인 양 팽창된 형태의 괴근식물을 위한 화분 제작을 의뢰받았다. 식물의 독특한 형태에서 그는 이전에 배웠던 망간이라는 재료에 떠올리고 상품 개발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의 실험과 개량, 개선을 거친 경험이 이후 망간 과포화 유약에 대한 연구의 단초가 됐다.
시중에는 망간 유약을 다룬 연구 사례나 자료가 드물다. 망간유는 어두운 계열의 발색제 또는 보조제로 사용하거나 붓을 이용해 장식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헌에도 정보가 거의 없었지만, 작가는 단순한 발색이 아닌 망간 자체의 ‘물성’을 중심에 놓고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발색 외에도 망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모습들이 있을 텐데, 그 부분을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더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덤볐어요. 지금도 그러고 있는 단계죠. 쉽지 않아요.”
작가는 망간유를 중심으로 1천개 이상의 시편을 제작하고 과정을 기록했다. 망간은 정제가 많이 되어 있지 않은 재료이다. 포대로 유약을 구입해도 실제 망간 성분은 70% 정도이고 철이나 규소 등 다양한 불순물과 재료가 섞여있는 채로 공급된다. 실험 과정에서 때로 1번부터 100번까지의 시편 전량을 폐기하기도 하는 등 실패와 도전을 반복했다. ‘Unveiled series’는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열개 미만의 유약을 적용한 결과물이다. 망간의 특성상 불순물이 적은 유약처럼 오차 범위가 적은 편은 아니지만, 작가 스스로 경험적으로 획득한 지식을 통해 결과물을 범위 내에서 컨트롤하고 있는 셈이다.
작년에는 보다 활발하게 기업 등과 협업을 진행했지만, 올해 그는 오롯이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물질이 사물이 되는 순간, 완성된 기물에서 온전한 자연스러움이 느껴질 때 작가는 기쁨을 느낀다. 작품 하나 하나를 잘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일상을 영위하는 매 순간이 그에게는 가장 익숙하고 편안하다. “많이 했지만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아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가는 사람으로서는 일면 또 기쁜 얘기이기도 합니다. 부끄럽지 않을 만큼 다양한 사례를 쌓고 보여드리고 싶어요.” 당분간 작업 기록과 논문 준비에 힘쓸 예정이라는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이다.
김기혜 독립큐레이터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Sep 2024) (6) | 2024.10.06 |
---|---|
류호식, 안온하고 평안한 집 (Aug 2024) (0) | 2024.08.08 |
오세린, 삶의 아이러니와 서사 (Jun 2024) (1) | 2024.06.09 |
아네모이아, 우리의 데자뷰 (May 2024) (0) | 2024.05.14 |
은소영, 그녀의 방 (Apr 2024) (0) | 2024.04.24 |